"할 얘기 없심더." "흠." 꽤 싱거운 반응이다. 벽람은 입에 대충 다과를 쑤셔 넣고 다시 상을 밀어둔 채 붓을 잡았다. 별 시답잖은 이야기로 시간이라도 끌어보려 했더니 쉽게 속지 않는다. 옥황은 차를 한 모금 넘기며 벽람을 보았다. "그럼 그 은장도는 무엇 때문에 용궁에서 훔쳐 나온 게냐. 그걸 훔치면 제아무리 너라도 용왕이 엄벌에 처할 텐데." "옥황...
처음으로 심청이 그를 내려다보고, 그는 심청을 올려다보았다. 무명은 검을 떨어트린 채 심청에게 항복한다는 뜻으로 붕대를 칭칭 감은 양손을 들었다. 심청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제 검을 집에 넣고선 주저앉은 무명에게 손을 뻗었다. 무명이 손을 맞잡고 일어서며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공주님, 훌륭하십니다." "아니에요, 다 좋은 스승을 둔 덕분이죠."
저는 이 약속을 지킨 후 앞으로 인간사에 최대한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문장도 더럽게 길고 한 번 쓰는 데 오래 걸린다. 근데 이걸 한 줄 써도 종이의 가로줄 하나를 채울 수 없었다. 벽람은 제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으로 종이를 노려보았다. 종이는 어째 써도 써도 끝이 없었다. 평소에 자매 형제들과 대련할 때는 어깨나 팔, 등이 쑤신다는 느낌을 받을 수 ...
"심청 공주님이 살아계셨다!" 마을 사람들, 산해에게서 살아남는 생존자들이 우글우글 모인 앞에서 장연이 크게 외쳤다. 심청의 얼굴을 아는 이들이 심청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정말 심청이 실존하는지 제가 직접 만져서 확인하기 위해 심청에게 손을 뻗었다. 심청의 손을 잡고 팔을 잡고 심청의 뺨을 쓰다듬었다. 심청이 진짜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들은 눈물을 흘...
오랏줄에 꽁꽁 묶인 벽람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옥황의 시선을 무시했다. 자리에 잔뜩 쌓인 두루마리를 한쪽으로 치운 옥황은 두 손을 모으고 벽람을 자애로운 미소로 빤히 보았다. 옥황의 좌석 옆에, 따로 자리를 내고 앉은 보좌관만 바삐 두루마리를 처리했다. "그래, 간만에 보는구나." "예." '새해에 봤음서…….'
"짐덩이를 끌고 왔구나." "죄, 죄송합니다." 사사가 벌벌 떨었다. 왕좌에 앉은 이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두루마리를 쥔 신하는 겁을 잔뜩 먹은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한 번, 왕좌에 앉은 이를 한 번 번갈아 보았다. "도대체 무슨 혹을 달고 온 건지 볼까."
바깥에서 생활하는 건 익숙해지질 않는다. 심청은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에 마른 가지를 하나 던져 넣었다. 매서운 겨울은 끝이 나고 땅이 차차 녹고 있었다. 곧 이곳에는 개구리 우는 소리와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로 가득 찰 터였다. 하지만 이곳은 여전히 겨울이다. 바싹 마른 죽음의 향이 진동했다. 벽람은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틀어막고 싶은 것을 겨우 참...
벽람이 멍청해서 심청의 부탁을 들어준 건 아니었다. 하물며 심청이 안타까워서도, 한 톨 남아있는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감히 용 앞에서 거짓을 고한 미물에게 이런 아량을 베풀리 없었다. 단지 벽람에게 심청의 부탁은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벽람의 지금 상황을 생각해봤을 때, 심청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용궁과 동해를 떠나는 것이 수지타산에 ...
심청, 동해와 가까이 있는 어느 작은 소국에서 태어난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인이다. 비범한 출생도, 숨겨진 혈통도 없다. 단지 몸이 허약한 어미가 심청을 낳은 후 얼마 안 가 죽었다는 정도가 특이점이다. 심청의 어미가 죽은 후 홀아비가 심청을 키우기란 꽤 힘든 일이었다. 심청이 갓난아기일 때는 동냥젖을 먹이고, 심청이 아장아장 걸을 때에는 심청의 아비를 안타...
모든 것이 활활 타올랐다. 심청의 앞에서 많은 것이 무참히 스러졌다. 매서운 겨울을 땅 속에서 버티고, 겨우내 피어난 초록은 한 줌 재가 되었다. 심청은 그걸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심청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아무 능력도 없는 심청 하나를 지키겠다고 심청의 사람들은 피 묻은 옷자락으로 그를 감싸 안고 도망치라 등을 떠밀었다. 심청은 그들의 희생을...
바다는 대체로 잠잠하다. 물론 인간이 보기에는 거칠 때도 있지만, 깊은 바다는 별일 없이 잠잠해 보이기만 하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벽람의 생각은 그러했다. "해룡 님, 제발 주무시지 말고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듣고 있어."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했다. 벽람은 하품을 찍 하며 제 앞에 서서 쩔쩔매는 인어를 보았다. 인어는 어떻게...
"이거 귀엽다, 야." 김대범이 해군복을 입은 마린마린 인형을 잡았다. 우청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김대범이 있는 곳으로 성큼 다가왔다. 빙긋 웃음을 짓고 모자를 쓴 마린마린은 누가 봐도 귀여웠다. 우청희가 인형을 향해 손을 뻗자,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마린마린의 단정한 해군복이 순간 빨갛게 보였다. 마린마린의 인형 솜이 삐져나오고 실밥이 죄다 터진 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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